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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태용 기자
  • 기고
  • 입력 2010.06.11 01:24

“우리는 백의민족인가?”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

▲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 ⓒ2010 더리더/이태용
【태백 더리더】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말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것이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즐겨 쓰는 말인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백의민족에 대해 ‘예로부터 흰옷을 즐겨 입는데서 한국민족을 일컫는 말’ 이라고 되어 있다.

  혹시나 하여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한민족의 별칭,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한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백민(白民)이라고도 한다.’ 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흰옷(白衣)을 즐겨 입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천학(淺學)하여서 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역사서 어디에도 백의민족이란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백의민족 숭상파들은 백의민족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 사서를 이 잡듯 뒤졌으나 백의민족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자, 중국에서 기술한 중국 역사서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겨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서 「在國衣尙白,白布大袂,袍,袴,履革鞜」이라는 문구를 찾아내고는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라고 해석하며 백의민족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뿐, 다른 어느 사서에도 백의민족 비슷한 말이나 흰옷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중국의 삼국지 고구려조에 보면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집단이 있는데, 조의(皁衣)는 검은 옷을 뜻하는 말로써 그들은 항상 검은 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 나오는 흰색의 의미와 흰 옷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그것은 집에 있을 때나 하늘에 제사지낼 때 흰옷을 입는다는 말이고 일이 있을 때는 흰옷을 입지 않는다.

  실제 위지 동이전 부여조의 다음 대목을 보면 「出國則尙繪繡錦罽」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해석하면 “ 나라 밖(집 밖)을 나갈 때는 비단이나 모직에 알록달록 수를 놓은 옷을 즐겨 입는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부여 사람들은 집안에 있을 때와 제사 지낼 때만 흰옷을 입고 나들이 할 때는 화려한 색깔 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일본사람들 말마따나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흰옷을 주야장천 입었던 것이 아니라 신성한 제사 때나 상중(喪中)일 때 입고, 혹은 속옷 개념으로 입거나 일이 없을 때나 집안에 있을 때 등은 막 옷으로 염색하지 않은 옷을 입었지, 외출하거나 즐겁거나 경사스러운 날에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 ⓒ2010 더리더/이태용
  예전에 우리 겨레는 색동옷과 노랑저고리 다홍치마를 즐겨 입었고, 혼인할 때 신랑은 사모관대에 푸른 관복에 가죽장화를 신었고 신부는 원삼 족두리에 화려한 활옷을 입고 비단꽃신을 신고 혼례를 올렸지 서양 사람들처럼 흰 면사포 쓰고 흰 치마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흰색 옷을 죽음의 옷이나 근신(謹身)의 옷으로 여겨 제사(祭祀) 때나 문상(問喪) 갈 때 혹은 상중(喪中)일 때 입었지 경사스러울 때는 입지 않았다.

  그리고 흰옷의 개념을 말하자면, 모든 직물(織物)은 염색하기 전에는 기본적으로 희다. 명주도 짜놓으면 희고 모시나 무명 삼베도 처음엔 누르스럼한 흰색이다.  

  그것을 잿물에 삶고 빨면서 햇볕에 바래면 점점 하얗게 변한다. 이렇게 기본적인 원단이 흰색인데 거기에 물감을 드리면 채색 옷감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명주는 고치실을 물감 들여 짜지만 모든 직물이 처음엔 희다.

  신라 이후로는 옷 색깔이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다보니 신분에 맞게 염료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천민이나 일반 백성이 지나치게 화려한 물감을 들인 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민이나 일반 백성들은 원단 그대로인 채로 옷을 해 입으니 자연적으로 희수그레한 옷 색깔이 되었던 것이고 그 옷을 빨면 빨수록 방망이질을 하면 할수록 흰옷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가 통치이념이고 철저한 반상 제도의 조선시대 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면 백의민족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나라 역사서 어디에도 없는 ‘백의민족’이란 뜬금없는 말이 어찌하여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을까.?

  그것은 조선조 말엽과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역사와 그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의 상인이나 선교사 또는 각국의 관리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각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활동했고, 그 들은 나름대로 조선에서 보고 들은 대로 보고서나 기행문 형식으로 글을 써서 본국으로 보내거나 돌아가서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그들이 본대로 들은 대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잣대로 본 현상이지 조선 사회를 이해하고 쓴 글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들 때문에 서양 세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알려지게 되었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양이(洋夷)들이 대거 몰려오게 되었다.

  그 때 독일 상인 오페르트라는 사람이 쓴 조선의 관측기록에 보면, “조선 사람의 옷 색깔은 남자나 여자나 대개가 희다”라고 한 것이 아마 최초의 흰옷 기록으로 보여 지며, 이것이 백의민족이란 말이 나오게 된 계기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 보면, “그러나 어린이들은 도리어 가지각색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데 가장 흔한 옷 빛깔은 맑고 푸른색 아니면 진홍빛이다”라고 하여 어른과 아이들의 옷 색깔이 다름도 기술했다.

  그 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최초 여성 회원이던 이사벨라 비숍이라는 여성이 서기1898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흰옷과 빨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조선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는다고 하였다.

  서기 1920년대에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미술」이란 글에서 우리의 백의(白衣) 풍습에 관해 말하길, “남녀노소 다 같이 흰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 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라고 했는데, 참으로 견문이 좁았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방 회교권에 가 보면 모두가 흰옷을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야 말로 백의민족들 이다.

  그러니 조선 말기에서 구한말에 걸쳐 우리나라에 왔다가 간 서양인들 눈에 우리 겨레가 흰옷을 즐겨 입는 것으로 비추어 졌고 그들의 글을 통해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으로 부르게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사서 어디에도 백의민족이란 단어가 없고 실제 백의민족이란 단어도 서기 1900년대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그들이 조선 땅에 왔을 때 조선인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 뜻을 모른 채 단지 흰옷만 보고 갔을 뿐 어찌하여 흰옷을 입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하다 보니 예(禮)로 나라를 다스렸다 고 할 수 있다.

▲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 ⓒ2010 더리더/이태용
  예는 효(孝)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효를 충(忠)보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인식하여, 전쟁을 하던 장수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여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쟁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일을 그르다 하지 않았다. 효는 만상의 근원이요 모든 예의 근본이기에 기본인 효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충을 제대로 행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당시 조선에는 국상(國喪)이 많이 생겼다. 고종 즉위년에 철종이 승하하고 그 전에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 헌종의 비 효현왕후 김씨 등이 돌아가시고 그 후 명성황후 민씨도 돌아가시고 조대비도 돌아가시고 그밖에도 세자 세자빈 그리고 왕족들이 많이 타계 했다.

  조선의 법도로 본다면 국상(國喪)은 부모상(父母喪)과 같은 것이다. 국상이 선포되면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모두가 당연히 흰옷을 입어야 했고 검은 갓도 흰 분칠을 해 백립(白笠)으로 해야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 조선의 예(禮)이다. 이러한 예법은 서기 1970년대까지 남아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시에 많은 국민이 소복 차림으로 울면서 국장의 예를 갖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국상(國喪)은 부모상(父母喪)과 같이 3년 상이다. 국상이 끝나는가 하면 또 국상이 생기고... 조선조 말기에서 구한말 끝날 때까지 조선인들은 흰옷을 벗을 날이 없었다.

  그 중간에 집안에 누군가 돌아가시면 또 상복(흰옷)을 입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천민들은 늘 상 물들이지 않은 옷을 입어야 했고, 당시에 양반 반 천민 반이던 시절이니 그야말로 흰옷 천지였던 것이다.

  이때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니 정말 염색 기술이 없는지 모두가 흰옷을 입고 있으니 신기할 밖에 또 있었겠는가.

  국상을 당한 우리는 당연히 상복으로 흰옷(소복)을 입어야 하고 그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서양인들이 보았을 때 신기했을 것이다.

  이것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인들이 저들과 다르게 구분코자 백의민족을 은근히 부추겼고 반발 심리로 우리들은 그 근본을 모른 채 오늘날까지 우리겨레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백의민족, 그렇게 자랑스러운 말도 아니고 또한 우리겨레는 백의민족(白衣民族)도 아니다. 밝다는 뜻과 희다는 말은 다른 것이다.

  << 본 내용은 더리더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이태용 기자 leegija@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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