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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더리더
  • 기고
  • 입력 2010.01.22 00:02

“민심 잡으면 승리할 수 있다”

성희직 시인의 ‘선거 이야기 나의 선거 이야기’ ⓛ

▲ 성희직 시인. ⓒ2010 더리더/이태용
  ◇ 지역리더를 선택해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지자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유권자들도 시선을 모으고 있다. 

   ‘더 리더’는 ‘광부출신 도의원’, ‘광부 시인’, ‘전국 유일 민중당 당선자’ 등 수많은 수식어를 만들어 낸 성희직 시인에게 선거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선거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그가 경험한 선거를 ‘선거 이야기 나의 선거 이야기’란 제목으로 월 2회씩 연재한다. <더리더 편집부>

  【태백 더리더】 성희직 시인 = ‘자고 나니 하룻밤사이에 유명해졌더라.’는 말이 있다.

  내 경우가 그랬다. 해직광부출신이 1991년 6월에 치룬 광역의원선거에서 강원도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보수진영이 ‘빨갱이정당’으로 불렀던 민중당후보로 출마한 50여 명 중 ‘유일한 당선자’였다.

  더욱이 시인이자 ‘광부’가 강원도의원선거에 당선되었으니 언론에선 좋은 뉴스거리였던 모양이다.

  며칠 후 동아일보는 나의 당선소식을 신문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크게 보도하였다.

  ‘인간승리’란 제목으로..... 동아일보 뿐 아니라 여러 언론에서 ‘광부출신 도의원당선자’ ‘광부시인’ ‘전국유일 민중당당선자’ 그런 수식어로 나의 이야길 크게 보도하였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희소성과 나의 특별한 이력에 언론이 큰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인간승리라고 할 건 없지만 나의 당선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기적은 성희직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탄광촌 사북, 고한지역 광부들의 힘이었다.

  오랜 세월 전쟁터 같은 지하막장에서 ‘막장인생’으로 살아온 그들의 피눈물과 한을 ‘광부후보’를 통해 표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후보자가 단돈 1만원도 쓰지 않은 선거. 유급운동원 한명 없이 자원봉사자만으로 치룬 선거. 상대에 대한 비방과 흑색선전이 전혀 없었던 선거. 그렇게 깨끗하고 모범적인 선거운동으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민심의 힘’이었다.

  당시 내 선거구엔 모두 4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광업소사장과 전)광산노동조합연맹위원장, 그리고 회원 5천명이 넘는다는 ‘상조회’ 대표들에 견주어 나는 내세울 변변한 이력하나 없는 후보였다.

  후보등록을 하던 날 내 선거사무실에서 ‘후보자인지도’를 묻는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150여명의 응답자들 중에 나에 대한 인지도는 10%에 불과하였다. 10명중에 겨우 한명이 ‘성희직이란 이름은 안다’는 정도였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경남 거제에서 중장비사업실패 후 1986년 4월에 고한읍으로 이사하였다.

  지역엔 선거의 기본인 학연, 지연, 혈연이 전무한 처지였다.

  지역구에 겨우 5년을 살면서 한 게 채탄광부일밖에 없으니 지역유지나 상인들, 가정주부, 노인계층에선 ‘성희직’이란 사람을 알리가 만무했다.

  후보로 등록하던 날 부산에 계신 아버지께 알렸더니 “니가 분수도 모르고 되지도 않을 짓을 한다!”며 버럭 화를 내셨다.

  나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이 그럴 정도였으니 유권자들이 성희직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호 3번 민중당후보 성희직’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등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가장 먼저 광부들의 눈빛에서부터 ‘수상한 기운’이 꿈틀댔다. 광부들의 가슴속엔 부싯돌을 치듯 반란의 불꽃이 튀었다.

  며칠이 지나자 시뻘건 연탄불화력에 구들장이 점점 뜨거워지듯 광부들의 가슴 가슴으로 불길이 번져갔다.

  그런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광부들이 성희직의 당선을 위하여 신들린 듯 뛰어다녔다.

  대부분 나와는 그동안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그랬다.

  당시엔 4종의 홍보물을 유권자들에게 직접 돌리는 방식이었는데 그 일을 자원한 봉사자들이 넘쳐났다.

  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선거운동원들이 무조건 성희직을 위해서 탄광마을 곳곳을 뛰어다녔다.

  “도대체 성희직이가 어떤 사람인데 운동원들이 저렇게 열심이냐?” 운동원들의 열성과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유권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당시 내 홍보물과 선거벽보사진은 양복차림이 아닌 작업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차별화된 벽보도 광부와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후보들의 말쑥한 양복차림과는 달리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작업복차림에 동질감과 동료의식을 느낀 것이다.

  “우리 광산쟁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보여주자” “작업복 입은 성희직이가 진짜 우리 편이다!” 광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런 여론이 번져갔다.

  갑방, 을방, 병방 3교대로 출근하는 광부들이 광업소 일을 끝마치기 바쁘게 선거사무실로 달려왔다.

  그리곤 홍보물을 챙겨들고서 높은 산동네골목길을 뛰어 다녔다.

  자기주머니를 털어 술을 사주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성희직후보 홍보에 열을 올리는 광부들의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철모르는 아이들마저 엄마 아빠에게 “기호 3번 아저씨 찍어주라” “성희직 아저씨는 돈도 없고 불쌍하대, 꼭 그 아저씨 찍어주세요” 하며 조른다는 입소문도 퍼져갔다.

  밑바닥민심이 그렇게 꿈틀대고 있음에도 ‘빨갱이당 후보’에 대한 정보기관의 판단은 달랐다. ‘성희직이는 잘해야 2~3등입니다.’ 선거를 1주일정도 남겨 놓은 시점의 경찰의 첩보는 그렇게 올려졌다.(계속)

   << 본 내용은 더리더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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